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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정치&역사&경제&인구&학제&날씨&이것저것 본문
필리핀의 정치&역사&경제&인구&학제&날씨&이것저것
보라카이와 클락에 살면서 이것 저것 필리핀에 알아봤던걸 정리해 둔것입니다.
너무 길기는 하내요... 관심있으시면 보시는것도 좋을꺼 같아서 올려봐요 ^^
1.필리핀의 공식명칭: 필리핀 공화국(필리핀어: Republika ng Pilipinas 레푸블리카 냥냥 필리피나스, 영어 Republic of the Philippines 리퍼블릭 오브 더 필리핀스[*], 스페인어: República de Filipinas 레푸블리카 데 필리피나스
2.필리핀의 국화:삼빠귀따(Sampaguita)
나무: 나라 나무(Narra)
동물: 카라바오
3.필리핀 국기: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1대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귀날도가 고안을 했습니다
파란색-이상
붉은색-용기
흰색-평화와 평등을 상징
3개의 별은 루손섬, 비사야제도, 민다나오제도를 의미하며
8개의 햇살은 최초로 스페인에 반기를 든 8개주를 뜻합니다
(마닐라, 카비테, 불라칸, 팜팡가, 누에바에시하, 타를라크, 라구나, 바탕가스)
전쟁이 일어나면 국기를 거꾸로 게양 하는데요
그이유는 전쟁때 용기를 우선시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실제로 2번 거꾸로 게양 되었는데요
첫번째는 미국-필리핀 전쟁
두번째는 일본의 침공때
4.마닐라의 어원: 오늘날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Manila)란 도시명은 원래는 'Maynilad'였다고 한다.
'Maynilad'는 옛날 스페인어인 'May'와 'Nilad'라는 합성어라는데,
'May'는 'There is'란 뜻이고 'Nilad'는 망그로브나무(Mangrove)란 뜻이란다.
즉 '망그로브나무가 있는 곳'이란 뜻이 되겠다.
아마도 옛날 마닐라가 도시로 발달되기 전에는
바닷가에는 망그로브나무가 우거진 곳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마닐라 부근 바닷가에 망그로브나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Manila'란 도시이름은 'Maynilad'
즉 '망그로브나무가 있는 곳'에서 연유된 것임은 분명하다.
수가도 된때:1989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결과 미국령이 된 뒤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거점으로 항만시설의 근대화,도시계획의 실시,전기.가스.수도등의 시설이 이루어져,식민지 특유의 단일 거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되어 시가지의 80%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복구되었다.필리핀이 독립한뒤 1948년 북쪽에 인접한 퀘손시티로 수도가 옮겨졌으나 1975년 11월 마닐라.퀘손등 수도권 4개 시와 인접지역을 통합한 Metropolita Manila가 발족하여 다시 수도가 되었다
5.1페소 밑의 단위: 화페단위는 페소이며 지폐는 1천페소,500페소,200페소,100페소,50페소,20페소 동전은 10,5,1페소가 있으며 페소 밑의 하위 단위는 centavo가 있다 센타보에는 25,10,5센타보가 있다
6.필리핀 지페
7.마젤란이 처음으로 필리핀에 도착한 곳:마젤란은 포르투갈에서 출생한 에스파니아의 항해자로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하였다.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 항해의 지휘자
* 1519 -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
* 1521 - 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에 의해 5월 27일 살해 당함.
* 1522 - 9월 6일 마젤란의 선원중 18명과 배 1척만이 귀환 함
8.필리핀의 어원과 이를 처음 명명한 사람:‘필리핀’이란 이름은 당시의 스페인 황태자, 후에 펠리페 2세의 이름에서 유래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스페인 전성시대의 왕이다.
필리핀 이름을 붙인 사람은 당시 스페인의 멕시코 총감인 빌라로보스이다. 16세기 무렵 현재의 필리핀 주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부딪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빌라로보스는 함대를 이끌고 이 땅을 방문하여 이 지역 일대를 필리핀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빌라로보스는 1543년에 민다나오 섬의 안보이나라는 곳에서 원주민들의 저항과 먼저 상륙해 있던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일찍이 페르디난도 마젤란 역시 필리핀에 도착한 후, 부족 간 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한다.
이리하여 스페인은 어렵게 필리핀을 손에 넣었지만 1901년, 미서 전쟁에서 패한 후 필리핀을 미국에 매각하게 된다. 그 후, 필리핀에서는 독립운동에 불이 붙어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점령당한 이루 1946년에 독립하게 된다. 스페인에 오랜 세월 통치를 당했던 필리핀에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
9.사라고사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전제하에 지구의 남북으로 임의의 선을 그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역을 구분했지만 지구가 둥글 경우에는 하나의 선이 더 있지 않으면 분할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양국은 동남아시아의 몰루카 제도의 귀속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는 몰루카 제도가 당시의 귀중품인 향신료의 산지였기 때문입니다.
몰루카 제도는 1494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맺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이은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라고사 조약은 몰루카 제도의 서쪽인 동경 144도 30분을 제2의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에 스페인에 배상금을 지불했습니다.
10.선린조약:
11.산미구엘:
산미구엘 San miguel 맥주의 어원은 라틴어 로서 san 은 영어로 ST. (세인트) 한국어로 풀이하면 성스러운?? 이런뜻이며..miguel 은 영어로는 Michael (마이클) 한국에서는 대천사 미카엘 이라는 뜻입니다 필리핀은 아시다시피 스페인의 식민지 역사를 300년 이상 받은 나라이기에 전국민의 90% 이상이 카톨릭이라 필리핀 사람들이 편하게 기억할수 있는 이름에서 술의 이름을 따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산미구엘 클래식 격인 필센(PIISEN)을 체코의 맥주회사인 폴 필센사 제휴하여 그맛과 향을 높였으며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탄이유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유람선인 빅토리아 내에서 판매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일반 맥주의 제조 기술과 달리 좀더 맛과 향이 고소한 이유는 맥주를 만들때 일반맥주 와 달리 보리와 옥수수를 썩어서 만드는 기술에 있다고 합니다
12.필리핀 민족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스페인 수도회가 정점에서 필리핀 가톨릭 교회에서 필리핀이라는 이유로 본당 주임 사제로 승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가졌다. 그들은 이러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마리아노 고메즈(Mariano Go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자모라(Jacinto Zamora), 세 신부를 지도자로 하여 교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지청은 1872년 1월 20일 군항 카비테에서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세 신부를 배후로 몰아 같은 해 2월 17일 3명의 신부 전원을 처형하여 교회 개혁 운동을 압살했다. 이 사건을 세 신부의 이름을 따서 ‘곰부르자 사건’(GOMBURZA, GOMez + BUrgos + ZAmora)이라고 불렀다.
13.카티푸난: 필리핀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자 정당이다. 1892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설립하였다. 필리핀의 첫 독립 이후 1897년 이후에는 정당으로 변신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1892년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에 의해 필리핀의 민족주의 단체로 설립되었으며,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에밀리오 아기날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이 주요 지도자였다. 1901년 이후에는 미국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창설자 보니파시오는 4년여 간 필리핀 각지에 독립지사들을 포섭, 1896년 8월 스페인에 대한 봉기를 선언했다. 훗날 아기날도 역시 카티푸난에 영입했는데, 1897년 카티푸난의 내부 항쟁에서 아기날도가 승리하여 보니파시오를 총살하고 지도권을 잡게 된다.
14.보니파쇼: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1863년 11월 30일 ~ 1897년 5월 10일)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부른다. 무장 독립운동 단체 카티푸난(Katipunan)의 설립자이자 초대 수령이었다. 그는 필리핀 독립운동가 중 무장항쟁론자에 속한다. 스페인 식민 통치 말기, 무거운 세금과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1892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 단체인 카티푸난이 결성되고 1896년 8월에 카티푸난을 이끌고 '푸가드 라윈의 통곡'이라는 이름의 무장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는 대 스페인 항쟁과 대 미국 항쟁의 기원이 된다. 아기날도 역시 그가 만든 카티푸난에 참가했으며 1897년 카티푸난의 내부 항쟁에서 아기날도가 승리하여 보니파시오를 총살하고 지도권을 잡게 된다. 민족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호세 리살이 필리핀에서 스페인 통치의 개혁과 자치 운동을 바란 것과는 달리, 보니파시오는 처음부터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대 스페인 무장 투쟁을 하다가 1892년 마닐라에서 비밀결사단체 카티푸난을 결성했다. 그 뒤 홍콩에 망명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 등을 영입하여 필리핀 해방 운동을 꾀했으나, 스페인 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여 지도력을 잃었다. 1897년 독립한 혁명정부에서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려다가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의해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그의 시신과 동생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안드레스 보니파치오에게는 합당한 장례조차 치러지지 않았다. 안드레스 보니파치오가 죽은 뒤 그의 부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는 30일간 산 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이는 훗날 영화화되어 <위대한 행방불명자>라는 영화의 소재가 된다.
1946년 필리핀의 독립 이후, 필리핀의 독립 영웅이자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의 한사람으로 추앙되었다. 1969년 필리핀 지폐 5페소의 주인공으로 도완되었고, 1978년의 필리핀 지폐 5페소의 주인공으로도 도완되었다. 2007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 의해 그의 생일인 11월 30일은 보니파시오 데이(보니파시오의 날)로 정하고 공식 필리핀 국경일로 정하였다.
<현재 마닐라 도시의 이름중 하나로 가장 비싼 신도시로 개발중에 있다 각종 관공서와 대사관 이전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도시의 분위기는 이곳이 필리핀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다>
아귀날도: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 3월 23일 ~ 1964년 2월 6일)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며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이다. 처음엔 스페인, 뒤에는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 1898년 6월 12일 카비테에서 필리핀 독립선언을 하였다. 카비테에서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은 말로로스에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혁명의회를 소집하였다. 필리핀의 국부(國父) 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호세 리잘 등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에 저항한 민족 해방 운동에 동참하였다. 1896년 카비테 시장이 되고, 당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혁명조직 카티푸난의 지역 책임자였다.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미국과 스페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원조를 받아 다시 독립 전쟁을 지휘하였다. 1899년 필리핀 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체포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901년 미국과 대항해 전쟁을 하다 패하고 정계에서 은퇴, 1935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패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반미 심리전에 가담하여 일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일 필리핀 화폐 5페소 지폐의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에밀리오는 1869년 3월 23일 스페인령 필리핀 루손 섬의 카비테에서 칼로스 아기날도와 트리니다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1869년 3월 23일 당시는 성 금요일이었으며 카윗 마을은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3일 째 계속되는 진통으로 인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희박해지면서 아버지 칼로스는 폭죽을 터트리기로 결정했다. 급작스런 폭발음으로 놀란 트리니다드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낳게 되었다. 필리핀인과 중국인, 타갈로그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었으나 아기날도의 집안은 필리핀 카비테 주(州)의 명문가의 후예였다. 그가 3세가 되었을 때 홍역을 치른 직후 1872년 카비테 지역에 반스페인 폭동으로 혼란한 상황이 닥쳤다. 갑작스러운 소요사태에 당황한 친척들은 그를 작은 나무 아래 방치해놓은 채 피신했다. 후에 에밀리오를 찾았을 때는 개미에 물려 온몸이 부어 올랐으며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완전히 쉰 상태였다. 야생 늑대와 호랑이, 들개 등이 다녔는데도 방치된 상태에서 그는 극적으로 생존해 있었다. 그는 홍역이 재발하여 빈사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시아 최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필리핀 화폐 5페소 지폐(현재는 동전)의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15.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에 이양된 조약: 필리핀-미국 전쟁(Philippine–American War, 타갈로그어: Digmaang Pilipino-Amerikano)은 1899년에서 1902년까지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으로 미국-필리핀 전쟁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충돌은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에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필리핀 제1공화국의 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3][4]
전쟁은 공식적으로 1902년 7월 4일에 끝났으며, 100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들이 죽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필리핀 군인들과 다른 저항군들이 미국이 통치를 끝낼 때까지 미국의 침략에 저항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1901년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896년 이후 스페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필리핀 사람들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아래 1898년 6월 12일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1898년 12월,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 독립을 돕기위해 스페인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조약에서 2,000만 달러로 필리핀을 매입하여,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1899년 1월 1일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그는 다음 마로로스 의회를 조직했는데, 미국에서는 8월 14일에 1만 1000명의 지상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 보내졌다. 미국은 필리핀 침략을 위해 반항하는 필리핀인 60만 명을 잔혹하고, 극악하게 학살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결국 필리핀과 쿠바 두 섬에서 미군에 밀려 패퇴를 거듭한 에스파냐는 미국과 강화를 추진하였고,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서 맺어진 《파리 강화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고,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지불키로 하였다.
1899년 4월 11일 - 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휘함. 미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포함하는 스페인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을 획득함. 미군정이 실시됨.
<미국은 120년전 스페인으로부터 2천만 달러에 필리핀을 괌,푸에르토리코를 사들임>
17.가쓰라 테프트 조약: 가쓰라-태프트 협정(일본어: 桂・タフト協定, 영어: Taft–Katsura agreement) 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이 기록의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간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서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므로 이는 미국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협력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태프트가 자신의 의견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만의 의견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제국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제가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밀약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를 상호 양해한 일종의 신사협정이었고, 이 합의로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일제는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18.1945년 미국이 마닐라를 탈환하고 세운 초대 대통령: 세르히오 오스메냐(Sergio Osmeña 1878년 9월 9일 - 1961년 10월 19일)는 필리핀의 제4대 대통령으로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임기를 마쳤다. 미국령 필리핀 자치령 시대(미국 연방)에서 두 번째 대통령이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었던 필리핀 자치령의 마누엘 케손 행정부에서는 부통령을 지냈고, 1944년 케손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자 그를 이어 65세의 나이로 직무를 이어갔다. 필리핀 국민당의 창당자로, 또한 대통령이 된 최초의 비사야 족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에 오르 전 1944년에 오스메냐는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세부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다 1878년, 세부에서 태어나 산후안 데 레토란 대학교에서 배웠고, 이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필리핀-미국 전쟁의 영향으로 학업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지만, 1903년에 대법원이 사법 시험의 수험을 인정하고 2등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1900년 자신이 설립한 세부 일간지 《엘 누에보 디아》 (새로운 시대)를 창간하여 평화적 수단을 통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세부 주지사에 취임하였다. 1906년 독립을 강령으로 하는 정당 금지령 해제 후 민족주의 정당의 합종연횡에 의해 결성된 국민당의 초대 당수가되었다. 1907년 제1차 총선에서 국민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16년의 양원제 의회에서는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23년에는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933년 독립 사절단으로 진력한 미국 의회의 헤어-하위스-커팅 독립법(10년 후 독립 승인)은 마누엘 케손의 반대에 의해 필리핀 의회에서 비준되지 않았고, 타이딩스-맥더피 법을 가져온 케손이 1935년의 연방 성립 시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 아래에서 부통령이 된다. 1944년 8월에 미국에서 케손이 병사함에 망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승격했다. 1944년 10월 23일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섬의 레이테 만에 귀환하고 타크로 반에서 연방 정부의 부활을 선언, 1945년 2월 27일 마닐라로 귀환했다. 전후 첫 대선에서 마누엘 로하스에 지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1961년 10월 19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7년부터 발행된 50 페소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었다.
마누엘 로하스(타갈로그어: Manuel A. Roxas 또는 마누엘 록사스, 1892년 1월 1일 ~ 1948년 4월 15일)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자 제5대 대통령(1946년 ~ 1948년)이었다. 7월 4일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 커먼웰스 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일주일 뒤 정식으로 필리핀 독립을 선포하였다.
마닐라 근교의 필리핀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했고 1917년 카피스 주 의원으로 정계 입문, 1919년 카피스 주지사(1919년∼1921년), 1921년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하원의장과 국가평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4년 제헌회의 의원, 1938년∼1940년 재무부 장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 풀려난 뒤 일시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였다.
1945년 상원 의원, 상원 의장 등을 역임하고 1946년 4월의 선거에 당선되어 5월 28일 커먼웰스 정부의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7월 4일 독립을 선언, 필리핀의 정식 대통령이 되었다. 정식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취임 초기부터 공산주의 집단인 후크발라합의 봉기 등에 직면하였다.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48년 대통령 재직 중 사망하였다. 후일 필리핀 화폐 100페소의 주인공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에 선출
1945년 필리핀 상원의원이 되고 그해 상원의장에 선출되었다. 8월 전쟁이 끝난 뒤 부역자 심판을 위한 법원이 설치되었으나 친구가 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보호를 받았다. 국민당의 자유주의 진영(후에 자유당이 되었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로하스는 선거가 가까울 무렵 국민당의 자유주의 진영과 함께 탈당, 신당을 창당했다. 그는 1946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경합, 결과는 근소한 차로 승리하여 커먼웰스 정부의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에는 엘피디오 키리노가 당선되었다.
1946년 4월 커먼웰스 정부의 네 번째 정부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이 선거에 참여해 자신들의 지도자 루이스 타루크 등을 하원의원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후크발라합의 강경파들은 몇몇 후크단 후보들과 함께 그의 대통령 취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시에 집권당이 된 자유당이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립 직후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로하스는 후크단에 대한 '무력정책'을 천명했다. 후크발라합은 밀림 지역으로 후퇴하여 오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군의 사기는 매우 저조했으며 정부군이 주민들에 대해 무차별 보복을 가함에 따라 오히려 후크발라합의 입지가 강화되어갔다.
5월 28일 커먼웰스 정부의 네 번째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미국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완전히 승인, 7월 4일 독립이 선포되면서 정식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필리핀의 정식 독립시기: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1962년에 국경일로 지정됐다.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필리핀 제1공화국(First Philippine Republic, 1899년 1월 21일 ~ 1901년 3월 23일)은 1899년부터 2년간 존재했던 필리핀에 있었던 정권이다. 1899년 1월 21일에 불라칸 주 말롤로스 시에서 선언된 말롤로스 헌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설립하고, 1901년 3월 23일에 이사벨라 주 팔라난 시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군에 구속되면서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의 기간에 존재한 필리핀 정부이다. 당시의 정식 명칭의 번역어는 ‘필리핀’이며, 정부와 의회의 위치에 연관된 ‘말롤로스 공화국’이라는 통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필리핀의 설립은 스페인 제국의 지배에 대한 필리핀 독립 혁명의 절정이었다.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 선언이 이루어져, 6월 23일 필리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 정권이 독재 지배를 대신했다.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폐하고, 1946년에 독립을 인정할 때까지 점령했다.
20.마르크스 시절 계엄령 선포 기간:페르디난드 에마누엘 에드랄린 마르코스(스페인어: 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 1917년 9월 11일 ~ 1989년 9월 28일)는 필리핀의 법률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11대 상원 의장, 3번째 총리였다. 1965년 대통령이 된 뒤 21년간 장기집권하면서 1972년 계엄령을 공포하여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통상 약칭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로 부른다.
-독재자로 악명 높았던 마르코스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필리핀을 계엄령으로 통치했다.
21.필리편 현 대통령:로드리고 로아 두테르테(타갈로그어: Rodrigo Roa Duterte, 문화어: 로드리고 드테르테, 1945년 3월 28일 ~ )는 필리핀의 정치인이다. 남레이테 주에서 태어나 남다바오 주 다바오에서 성장한 그는 다바오의 시장으로 재직하며 정치 기반을 쌓았다.
2016년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며, 필리핀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초법적 살인을 통해 범죄를 일소한다고 공약했다. 또한 그는 거침없는 막말 행각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필리핀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린다.
그의 가족은 중화인민공화국 푸젠성 샤먼시 출신의 이민자였으며, 1951년에는 민다나오 섬 세부 주의 다바오에 정착했다
사회 지도층에 오른 아버지와는 달리, 어린 시절 로드리고의 성격은 불같은 성격으로 곤경에 처할 때가 많았다. 자신을 모욕하던 일진 학생을 총으로 쏴버린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부정 행위로 인해 퇴학을 두 번이나 당하기도 했다
197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다바오 시 검찰의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로 재직할 당시 두테르테는 범죄자들에게 가차없는 검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1988년 '피플 파워' 민주화 운동이 벌어질 당시 다바오 시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3] 이후 1988년 두테르테는 지방검사직을 사직하고 민주필리핀당 (PDP-Laban)에 입당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4] 같은 해 다바오 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다바오 시에서 유력한 정치 가문 일원이었기에 손쉽게 당선되었다.2010년에는 3선 연임 제한규정에 걸려 선거 출마가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를 선거에 내보냈고 스스로도 부시장으로 동시 출마해 함께 당선되면서, 딸이 시장, 아버지가 부시장인 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3] 이후 2011년 다시 시장으로 당선되었으며, 2016년까지 총 22년간 다바오의 시정을 이끌었다.
두테르테는 시장 재임 시절 수많은 범죄자들을 처형해 '징벌자(The Punisher)'라는 별명을 받았다.다바오 시는 90년대만 해도 무슬림 무장단체와 공산군 활동 등으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던 도시였다. 두테르테는 시장으로 취임한 이후 다바오 시를 범죄없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식 선언했고, 강력한 테러 진압과 마약 퇴치 작전을 벌이면서 반군들이 물리쳐 밤에도 안전한 도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시내의 각 요지마다 검문소를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세력을 막았으며, 자경단을 운영해 범죄 용의자 1,700여명을 재판없이 처형하였지만 인권 침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반발에도 사형제와 공개처형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으며, 중국인 소녀를 유괴 및 성폭행한 남성 3명을 공개 처형시키기도 했다
두테르테는 2016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필리핀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고,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며 대통령 취임 6개월 내 범죄 소탕과 부패 척결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워 호응을 받았다. 필리핀에 만연한 범죄와 부패,빈곤을 근절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지지세력을 결집시켰다.5월 7일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는 "인권법은 잊어버려라"면서,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시장으로서 해왔던 대로 똑같이 하겠다"고 말해 수천명의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범죄 외에도 기존 정치 기득권 세력의 공약과 정반대인 방안들을 강조하며 관심을 모았고, 특히 중앙 정치를 끝내고 지방분권형 정치 체계를 통해 각 지방의 독자성을 강화하며, 지방별 맞춤 정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필리핀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4] 여기에 기존 정치세력이었던 마누엘 로하스 후보와 그레이스 포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해 여권 표가 나뉘는 호재까지 겹치면서, 5월 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00만 표를 얻어 상당한 표차로 당선에 성공했다
22.클락의 어원:앙헬레스의 역사:앙헬레스는 정착민들의 부지런한 개척 정신으로 척박한 땅을 개간 한 곳입니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에 위치하여 있으며 팜팡가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60.27㎢, 인구는 약 40만명 가량입니다. 앙헬레스 시티는 한국어 그대로 표현하면 "천사의 도시"입니다.
1829 년 12 월 8 일 "El Pueblo de los Ángeles" (영어: The Town of the Angels) 에 앙헬레스 도시로 이름지어졌는데, "스페인어"로 부터 따온 말이며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Town of the Angeles" 이며 "patron saints" (수호 성인 또는 수호 천사)를 기린다는 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락 공군 기지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건설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미군은 스페인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건설을 했고 그 결과 스페인은 미국에게 200 억을 받고 필리핀을 팔았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필리핀은 미국이 독립을 가져다 주는 줄 알았지만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는 날이 갈수 록 극심해 졌습니다.
일본과 전쟁과 점령하에서의 희생된 사람 보다 필핀과 미국간의 독립 전쟁으로 사망한 인원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에서 민간인만 60 만명이 넘게 희생되었습니다.
클락이라는 지역 명칭은 20세기 초에 필리핀에 복무한 미 통신대 소속의 Harold M. Clark의 이름에서 붙여졌습니다.
클락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마닐라에서 자란 인물로, 하와이에서 첫 비행을 성공한 미국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클락의 원래 지명은 "빠띠"입니다.
23.Stotsenbug:클락에 연병장(Parade Ground)
클락 내 연병장에서 매주 금요일~일요일 저녁에 야시장이 열립니다.
둘레는 정확히 2,050m구요. 일대에는 무료 인터넷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24.클락 국제공항 개항시기:필리핀 팜팡가 주 앙헬레스 시에 위치한 국제공항. 공항 코드는 이름인 "클라크"에서 따 온 CRK이다.
공항 이름인 "클라크"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이곳에서 활약했던 미국 군인인 해럴드 클라크에서 유래한 것이다.한때는 전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이름을 따서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국제공항"이라고 했으나, 이는 다름아닌 대통령이었던 그의 딸 글로리아 아로요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뜻에서 바꾼 것인데, 문제는 부정부패로 악명 높은 아로요에 대한 이미지가 당연히 좋지 않았으며, 결국 베니그노 아키노 3세가 집권하자 원래 이름인 "클라크"로 되돌렸다.
그런데도 은근 많은 사람들이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국제공항"이라는 구 명칭을 사용하며, 약칭도 거기서 따온 DMIA를 사용하는 상황이다.
1991년 인근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태풍까지 겹치면서 이 공항은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미군도 이곳을 버리고 철수한다. 이후 필리핀 정부는 재건 계획을 수립하여 1993년까지 모든 시설을 재건하였고, 이른바 "클라르크 자유경제구역"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어 1996년 6월 16일 민간에 풀면서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이하 NAIA)과 함께 마닐라의 양대 관문으로서 성장한다
아시아 노선들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터미널이 작다 보니 노선들도 매우 적은데, 조만간에는 노선들을 대규모로 확충할 계획이 있다
25.DMIA:디오스다도 마카파갈 국제공항(타갈로그어: Paliparang Pandaigdig ng Clark 팜팡가어: Sulapawang Internasyonal ning Clark / Pangyatung Pisulagpuan ning Clark, 영어: Clark International Airport (CIA), IATA: CRK, ICAO: RPLC은 필리핀의 클라크 특별 경제 구역과 앙헬레스시에 가까이 있는 공항이다.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국제공항(DMIA)이라고도 부른다. 이 공항은 전에는 클라크 공군 기지의 장소였던 클라크 특별 경제 구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클라크 공군 기지는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한 뒤 미국 공군에 의해 1991년 폐쇄되었고, 클라크 특별 경제 구역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 공항은 세부퍼시픽과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 항공의 허브 공항이자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의 경쟁 공항인데,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이 이 공항보다 착륙비가 높은 까닭이다. 이 공항은 정부가 소유 및 통제하는 회사인 클라크 국제공항공사(CIAC)가 관리하고 있다.
26.클락이 특별 경제 구역으로 결정된 시기:클락 특별경제구역(Clark Freeport and Special Economic Zone (CFEZ))[1]은 앙헬레스와 팜팡가주(Pampanga) 및 타락(Tarlac) 지방에 걸쳐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 클락자유구역(총 33,000ha)은 1991.11월까지 美공군기지 였으나, 미군이 철수하면서 필리핀내 대표적인 경제 특구로 개발. 개발을 위해 필리핀 정부는 동 지역을 CSEZ(Clark Special Economic Zone)으로 지정하고, 개발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클락개발공사(Clark Development Corporation)을 1993.4월에 설립
- 과거 美공군기지 였던 만큼 잘 정비된 도로(200 km에 달하는 2~3차 간선도로 보유)와 국제공항 보유(DMIA, Diosdado Macapagal Int'l Airport), 쾌적한 주거환경, 편의시설이 장점임.
- 특히 메트로마닐라와 근접성 및 발달된 인프라가 매력 요인으로, 2008년 클락구역 투자유치액은 96억페소로 전년비 3배 이상 증가. 특히 관광분야에서 대규모 투자가 이뤄졌으며, 그중 대표적인 건은 필리핀 기업인 Philippine Amusement and Gaming 사의 카지노 호텔 투자건(10.7억 페소), 한국기업인 CPR Palm Resort의 은퇴촌 프로젝트( 2.1억 페소), 또 다른 한국기업인 A-Peach 사의 건강리조트 프로젝트(2.4억 페소) 등임.
- 클락은 마닐라 북서쪽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 특히 North Luzon Expressway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지난해 부분 개통한 Sbbic-Clark-Tarlac 고속도로(SCTEx) 이용시 인근 수빅 자유무역지대까지 30분 남짓 소요
- 이외 CIAC(클락국제공항공사)는 메트로 마닐라와 클락공항을 잇는 120km에 달하는 고속철도 건설계획 발표, 이는 클락공항 확장계획 일환으로 현재 마닐라국제공항인 NAIA 공항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달할 것을 염두한 계획임(NAIA 공항 이용객은 연간 25백만명 수준), 일부 필리핀 대기업이 사업 참여를 검토중임.
필리핀 지역은 클락자유구역과 수빅만자유구역(1991까지 미해군기지 존재)을 동남아 물류, 서비스허브로 육성한다는 전략하에 개발 추진
이를 위해 DMIA를 확장 보수(제3활주로 및 국제선 터미널 건설) 하고 이를 전후한 장단기 개발 계획 수립, DMIA의 현재 연간 수용 승객규모는 2백만명이며, 매일 1회 인천-클락간 직항 노선을 운영중인 아시아나 등 5개 항공사 취항중
CDC는 클락자유지대를 4,400 ha의 주개발지구(Main Zone) 와 27,600 ha의 Sub Zone로 나누어 투자기업 유치중임.
CDC의 주요 투자유치 산업은 항공/물류, 제조, IT (BPO, Business Process Outsourcing 분야 중심), 관광(은퇴촌, 테마파크, 골프리조트 등) 등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미국철수->1993년까지 모든 시설을 재건하였고, 이른바 "클라르크 자유경제구역"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26.피나투보산의 화산폭발 이전의 높이와 현제 높이:피나투보 산(Mount Pinatubo)은 필리핀 북쪽 루손 섬에 있는 활화산으로, 1991년에 폭발하였다. 그때 당시 화산폭발지수 6에 해당했는데, 화산 분출로 인해 칼데라가 생겼으며, 사망자는 130여명으로 화산재로 인한 피해보다도 화산이류로 인한 피해가 대부분이었다. 피나투보 산은 1993년, 마지막으로 분출하였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활화산이다.1450년의 대분출 이후 활동하지 않던 화산이 다시 분화하였다. 1991년 분출 전의 화산은 칼데라가 없었으며, 높이도 지금보다 높았다. 그런데 화산이 분출하여 칼데라가 생기고 산의 높이도 낮아지게 되었다. 1991년의 분화로 인해 강력한 화쇄류와 화산이류가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726 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12년 카트마이 산의 대분출 이후에 일어난 대분화로, 20세기 마지막 화산 대폭발로 집계되었다. 또한 역대 발생한 지수 6의 화산폭발 중 마지막 이었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에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
이 폭발은 1919년 알래스카 노바룹타 화산폭발에 이어 20세기에 2번째로 큰 화산폭발로 기록되고 있어요.약 10km²의 농지가 사라지고 4만 채의 집이 무너졌으며, 65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지요.600년동안 거의 잠잠했던 1991년 6월 18일, 큰 폭발을 하고 말았다. 그때 당시 화산폭발지수 6에 해당했다.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내렸고 폭발하기 전 뾰족했던 산은 깎아졌다. 화산 분출로 인해 칼데라가 생겼으며, 이 산에 살던 아에타족과 주민 등은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사망자는 적어도 400명 이상이며 4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화산재가 서서히 가라앉아 농작물과 마을을 모조리 묻어버렸으며 주변 농지는 화산재가 너무 많아 농민들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대피해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화산재 때문에 폐럼에 걸렸고 그게 아니라도 재 때문에 눈에 심한 염증이 생겼다. 여기에 비가 쏟아져 생긴 화산이류로 마을과 길, 다리를 휩쓸어버렸다. 화산이류란 화산재 등의 분출물이 비(필리핀에는 스콜이 자주 내림)에 의해 점성이 약해지면서 흙이나 모래처럼 쓸려내려가는 것을 말하는데, 피나투보의 경우 그 규모가 어느정도냐 하면 산 아래 마을의 지표면이 전체적으로 수미터씩 상승할 정도였다. 폭발 5년 후 그 지역에 다녀온 봉사자들에 의하면 주변 모든 건물들의 1~2층이 땅속으로 잠겨버렸다고.. 이때문에 미국 해/공군은 남중국해 주요 기지이던 수빅 해군 기지와 클라크 공군 기지를 포기하고 필리핀에 반환했을 정도였다.
피나투보 산은 1993년 마지막으로 분출하였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1991년 6월 9일 분화를 시작한 화산은 사흘 뒤인 12일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버섯구름 같은 불기둥이 35㎞ 상공까지 치솟았고, 5㎦에 달하는 용암이 쏟아져나와 산을 타고 10㎞ 이상 흘러나갔다. 산을 중심으로 반경 20㎞ 안은 두꺼운 재로 덮여버렸다. 산꼭대기 부분도 날아가버려 1천745m였던 높이가 1천485m로 내려앉았다. 정상에는 지름 4㎞의 분화구가 새로 생겼다.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지구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분출된 2천만t의 아황산가스가 성층권에 체류하면서 황산의 물방울로 바뀌어 전 지구를 뒤덮었다. 황산 물방울은 태양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해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렸다. 그 결과 15개월 동안 지구 전체가 평균 0.5도 떨어졌다고 한다
<화산폭발은 0~8단계가 있다>
28.앙헬레스의 어원:앙헬레스는 정착민들의 부지런한 개척 정신으로 척박한 땅을 개간 한 곳입니다.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에 위치하여 있으며 팜팡가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60.27㎢, 인구는 약 40만명 가량입니다.
앙헬레스 시티는 한국어 그대로 표현하면 "천사의 도시"입니다.
1829 년 12 월 8 일 "El Pueblo de los Ángeles" (영어: The Town of the Angels) 에 앙헬레스 도시로 이름지어졌는데, "스페인어"로 부터 따온 말이며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Town of the Angeles" 이며 "patron saints" (수호 성인 또는 수호 천사)를 기린다는입니다.
앙헬레스 인구:
29.프랜드 쉽 바랑가이 이름: 바랑가이 아누나스
바랑가이(영어:barangay, 타갈로그어: baranggay)는 필리핀의 도시와 자치체를 구성하는 최소의 지방 자치 단위이며, 마을 지구 또는 구역을 나타내는 고유의 필리핀어이다. 또한 바리오 (barrio)이라는 옛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랑가이는 지명에서 종종 "Brgy"또는 "Bgy"로 축약된다. 2006년 12월 31일 현재 필리핀에는 총 41,995의 바랑가이가 있다
30.필리핀 소수민족:필리핀 제도는 수많은 이민족과 다른 언어를 가진 집단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의 다수는 기원이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로 알려진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민족언어학적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많은 집단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특히 저지대 해안에 살고 있던 집단이 문화에서 많은 외국적인 요소를 수용했다. 민족언어학적 국가들은 세부아노 족, 일로카노 족, 팡가시난 족, 카팜팡간 족, 타갈로그 족, 비콜라노 족, 와라이 족, 수리가오논 족, 잠보안구에뇽, 일롱고 족이라고 불리는 힐리가이논 족을 포함하고 있다.
서부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토착민 집단이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을 무어인(종교만 빼고는 전혀 유사점이나 연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을 따서 모로 족이라고 불렀다. 아구산 마쉬 야생 보호구역과 민다나오 고원지대에는 루마드 족이라고 불리는 토착민 집단이 있다. 이들은 모로 족과는 달리 이슬람을 신봉하지 않으며, (비록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을 했지만) 그들의 애니미즘 믿음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네그리토는 아시아 본토에서 건너 와서 필리핀에 약 9만 전 초기부터 정착한 선 오스트로네시안 사람들이었다. 최초로 알려진 사람들은 칼라오 원인 유적지의 사람들이었다. 네그리토의 인구는 2004년을 기준으로 약 3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그들의 종족 집단은 아티 족과 아에타 족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 양식은 대부분 서구나 이슬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학자들은 선 히스패닉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다수 집단이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이다. 다른 민족 집단은 필리핀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인, 한족, 인도인, 미국인, 스페인인, 유럽인,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민족 집단이다. 필리피노 메스티소라고 알려진 혼혈도 존재한다.
31.민다나오 지역에 이슬람 교도가 많은이유: 민다나오에는 중국 및 동남아 중계 무역이 있었지만, 남쪽에서 온 말레이계인들 사이에 이슬람이 퍼져 1380년 민다나오에서도 이슬람이 전해지고, 그후에 필리핀 각지에 퍼졌다. 특히 1457년에 술루 제도에 성립된 이슬람 국가 술루 왕국은 전성기에는 민다나오 섬, 팔라완 섬, 보르네오 섬 북부(사바 주)를 통치했다. 필리핀의 대부분의 영토는 스페인에 빼앗겼지만, 보르네오 북부는 영국에 차지하여 19세기말까지 존속하고 있었다.오늘날 민다나오는 필리핀 국민의 5 %를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 "모로인"("무어인"의 의미로 무슬림의 것)의 거점이 되고 있다. 모로인은 민족으로, 섬의 중부 라나오 호 주변 마라나오, 말레이시아 사바 주에 걸쳐 사는 타우스구인 등으로 나뉘어있다. 또한 가톨릭 및 무슬림 외에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원주민, 루마드 족도 존재한다.
그러나 민다나오의 압도적 다수는 로마 가톨릭, 특히 섬의 북부에 사는 부투안 사람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애니미즘에서 직접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 농장을 가진 지주와 토지가 없는 농장 노동자의 대립이 심각한 인구 과밀 지역인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와 북부 루손 등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농지를 가지기 위해 이민 정착을 했지만, 그들은 가톨릭교도이고, 언어도 원래의 민다나오 섬 주민과 다르기 때문에 마찰이 있었다.
다양한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미국, 일본, 필리핀 정부 등에 대항하여 몇 세기에 걸친 힘겨운 독립 투쟁을 계속 해왔지만,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독립하겠다는 그들의 소원은 전력 차로 인해 실패해 왔다. 필리핀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국토 통일 유지 정책과 민다나오에 국내 이민자의 유입으로 민다나오 인구의 대다수를 가톨릭교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의 주도권을 대체하는 무슬림의 분노와 수백 년에 걸친 분리 독립 운동에 불이 붙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과 신인민군(NPA) 등 다양한 반정부 단체가 필리핀 군과 내전을 빈발하게 벌였고 민다나오 서부는 위험 지대로 변했다.
32.장충체육관:1955년 6월 육군체육관으로 출발했다.1959년 8월부터 서울특별시가 운영을 맡았다. 이후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했다. 이 건물은 당시 서울특별시의 예산[2] 과 국고보조금을 바탕으로 하여 처음에 총자금 9,200만원이 투입되었으며[3][4],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되었고, 감리는 미국의 벡텔사, 그리고 당시 한국 기술 여건상 실현하기 어려웠던 직경 80m 철골 트러스돔(철골트러스 32개, 환상형 트러스 13개)의 구조설계와 건축설계 부분은 미국에서 귀국한 건축가 최종완이 맡아삼부토건이 건설한[7]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다.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은 나돌았지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이에 대한 보충적 의견으로 감리를 맡은 미국의 Bechtel Corporation 아시아 사무소가 당시 필리핀에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인들이 단순노무활동을 하는 등의 보조적 양식으로 일부 건설에 참여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장충체육관이 필리핀에 의해 설계 및 시공됐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 2011년말 이명박 대통령이 필리핀 방문시 교민들 앞에서 "우리 건설회사가 지을 수 없어서 필리핀 회사가 미국대사관, 문화관광부, 장충체육관을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발언이 다시 확대ㆍ재생산된 것이다. 또 일부 사회인사들이 언론을 통해 이같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어 이제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의 자금과 설계, 시공으로 지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필리핀이 당시 우리보다 훨씬 경제사정이 나았다는 점도 장충체육관의 국적불명을 부채질했다.
장충체육관의 소유권자인 서울시의 소극적인 대응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필리핀이 지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며 "50년이 넘은 건물이라 누가 건물을 설계하고 지었는지 자료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장충체육관은 당시 서울시의 예산 5억6000여만환(5600만원)을 투입, 건설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계는 당시 국내 최고의 건축가 고 김정수씨가 맡았고, 설계한 건물이 제대로 됐는지 계산하는 구조설계는 고 최종완 건축사가 담당했다. 고 김정수씨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명동성모병원, 연세대 학생회관 등을 설계했고 고 최종완 건축사는 16대 건설부장관과 3대 과학기술처장관을 역임했다. 시공은 필리핀 건설사가 아닌 삼부토건이 담당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장충체육관은 지름 80미터에 달하는 돔 형태의 철골구조물로 당시 국내 기술이 미약했던 건축사에서 대공간(외부하중에 대한 저항능력을 극대화한 건설구조)의 효시가 된 기념비적인 건축"이라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비슷한 시기 미국의 원조로 광화문 경제기획원청사(현 문화관광부)와 미국대사관이 미국기업 PA&E(설계)와 빈넬(시공)에 의해 만들어졌다"며 "당시 미국기업들이 의사소통 때문에 필리핀 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추정돼 장충체육관의 국적도 잘못 알려진 것 같다"고 말했다.
33.필리핀의 교육제도:
가. 필리핀은 'K to 12'라는 표어와 함께 기존의 초등 6년, 고등 4년을 거치면 대학에 들어가는 학제를없애고 2016년 6월부터는 초등 6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의 12년 학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필리핀의 의무교육기간이 10년에서 12년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 이러한 학제 개편의 배경은 질높은 노동 인력의 공급 및 기초 교육 개선이다. 1억 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지만 낮은 수준의 일자리 밖에 없어서 교육을 통해 보다 고급 노동인력을 고급화하기 위해서이다.
다. 필리핀은 2011년부터 정규 유아교육이 도입되면서 만 5세에 유치원 과정에 들어가며 초등학교는 우리보다 1년 빠른, 만 6세에 입학한다. 방학은 1년 중 가장 더운 4~5월 중에 이루어지며 6월부터 새 학년이 시작된다.
라. 필리핀의 가정은 보통 4~5명의 자녀가 있지만 학교 수는 그만큼 미치지 못하여 과밀학급과 과대학교가 많은 편이다. 학급당 40~50명이 공부하고 이러한 과밀 학급이 한 학년에 10여 개가 넘는 경우가 많다.
마. 가정마다 자녀가 여러 명이어서 가능성이 있는 아이만 학교에 보내고 나머지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노동현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필리핀의 검정고시 격인 ALS의 졸업식은 정규학교 규모만큼 큰 경우가 많다.
필리핀의 교육과정
가. 필리핀의 학생들은 자국어인 타갈로그어, 영어, 수학, 과학, 역사 등의 주요 교과목과 MAPE(Music, Arts, Physical Education)로 묶인 예체능 교과를 배우고 있다.
나. 영어교과의 경우는 학생 간의 수준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헐리우드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가장 기초적인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6학년 학생들이 훨씬 많다. 이러한 이유로 공식적으로 학생들을 우열반으로 나누기도 한다.
다. 학생들을 우열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지만 입학부터 졸업까지 이러한 구성원이 변화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보통반 학생들이 우수반 학생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라. 대학에 진학하기위해서는 각 대학이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본고사에 응시해야 하며, 국가 차원에서 일원화하여 실시하는 시험은 없다.
34.현재 중국과 영토 분쟁을 맺고 있는 지역: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가 12일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유엔해양법협약에 위배된다며 필리핀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다음은 분쟁이 전개된 주요 일지.
- 1947년 : 중국, 11단선 발표로 남중국해 대부분 해역에 대한 중국 영유권 주장, 이후 1953년에 2개의 단선을 제외해 9단선으로 변경하면서 통킹만 해역을 중국 영유권에서 제외.
-1994년 : 60개국의 비준으로 필리핀의 제소 근거가 된 1982년의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됨. 유엔해양법협약은 영해와 대륙붕,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필리핀은 1984년, 중국은 1996년 각각 유엔협약법협약에 가입함. 미국은 아직 이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 1995년 : 중국, 미스치프 환초(중국명 메이지자오·美濟礁)에 어민대피소 건설하며 장악. 필리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통해 항의.
- 1997년 : 필리핀 해군함,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黃岩島)으로 접근하는 중국 어선 저지. 중국 항의.
- 2009년 : 중국, 9단선 적용한 지도를 유엔에 제출하고 남중국해 섬들에 대한 주권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 이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가 대륙붕 연장 승인을 신청하며 자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데 따른 대응임. 필리핀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중국 주장에 항의.
-2011년 : 필리핀, 스프래틀리(중국명 난사·南沙) 군도 인근 해역에서 중국 순시선 2척이 필리핀 석유탐사선에 의해 강제로 진로를 변경당한 것에 대해 외교적 경로 통해 항의.
- 2012년 : 필리핀 해군함이 스카버러섬 인근 해역의 중국 어선 검사 후 중국 해안순시선과 필리핀 해군함 대치. 중국, 스카버러섬에 대한 실효지배 시작.
-2013년 : 필리핀, PCA에 중국 제소. 중국, 분노. PCA, 필리핀 제소 검토할 5명의 국제법 전문가 지명.
-2014년 2월 : 필리핀 정부, 마닐라 주재 중국 대사 소환해 중국 어업지도선이 필리핀 어선 쫓아내기 위해 물대포 발사한 것에 대해 항의. 중국은 중국의 주권은 논쟁거리 아니라며 무시함.
- 2014년 12월 : 중국, 주권과 영토는 유엔해양법협약의 판결 대상 아니라고 발표. 중국과 필리핀 협상 통해 분쟁 해결하기로 합의.
- 2015년 10월 : PCA, 필리핀이 제기한 15건의 주장 가운데 최소 7건에 대해 PCA가 판결 권한 있다고 밝힘. 11월 필리핀 주장에 대한 청문회 개최. 중국은 불참.
-2016년 7월 12일 :PCA, 남중국해 9단선에 대한 중국의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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